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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즈 요시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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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즈 요시히사는 일본 제국의 우익 운동가로, 1893년 한국으로 건너가 천우협을 조직했다. 1901년 우치다 료헤이와 함께 흑룡회를 설립하여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를 옹호하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대정익찬회 총무를 역임하고 흑룡회 2대 주간을 맡았으며, A급 전범으로 지정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공직 추방되었으며,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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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즈 요시히사
기본 정보
구즈 요시히사
구즈 요시히사
이름구즈 요시히사
로마자 표기Kuzu Yoshihisa
가나くず よしひさ
출생1945년 1월 21일
사망2023년 5월 27일 (78세)
출신지일본 도치기현 아소군 구즈정 (현 사노시)
학력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졸업
정치 경력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선거구도치기현 제5구
의원 수7선
가족 관계장남: 구즈 시게루 (사노 시장)
주요 경력중의원 의원
방위청 장관
복구청 장관

2. 생애

지바현 출신으로 1893년 한국으로 건너갔다. 1901년 우치다 료헤이와 흑룡회를 설립하고, 1931년 대일본생산당 결성에 참여했다. 전쟁 전부터 대정익찬회 총무를 맡았으며, 1937년 우치다 사망 후 흑룡회 2대 주간을 맡았다.[1]

1945년 11월 1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구즈 요시히사를 전범으로 체포하여 스가모 형무소에 구금하도록 명령했다.[2] A급 전범으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불기소 처분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극단적인 국가주의적, 폭력주의적 단체 및 법무총재 지정 단체의 유력 분자"라는 이유로 공직 추방되었다.[4]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2. 1. 한국에서의 활동 (1893-1901)

1893년 (메이지 26년) 한국으로 건너가 천우협을 조직했다.[1] 천우협은 표면적으로 한일 양국의 친선을 도모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한국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2. 2. 흑룡회 결성 및 활동 (1901-1937)

1901년(메이지 34년), 우치다 료헤이와 함께 우익 단체인 흑룡회를 설립했다.[1] 흑룡회는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를 옹호하며, 특히 한국과 만주 지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활동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1년(쇼와 6년)에는 대일본생산당 결성에 참여했다.[1]

2. 3. 대정익찬회 활동과 흑룡회 주간 취임 (1937-1945)

구즈 요시히사는 전쟁 전부터 전쟁 중까지 대정익찬회 총무를 맡았다. 대정익찬회는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직으로, 국민들의 전쟁 협력을 강요하는 데 앞장섰다. 1937년(쇼와 12년) 우치다 료헤이 사망 후 흑룡회 2대 주간을 맡았다.[1]

2. 4. 전범 체포와 석방 (1945)

1945년 (쇼와 20년) 11월 1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구즈 요시히사를 전범으로 체포하여 스가모 형무소에 구금하도록 명령했다.[2] 구즈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용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27일자 성조기 신문에는 그가 1평 반 정도의 다다미가 깔린 감방 안에서 몬츠키하카마(일본 전통 의상)를 입고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3]

A급 전범으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불기소 처분되어 석방되었다.

2. 5. 공직 추방과 사망

A급 전범으로 지정되었지만, 이후 불기소 처분되어 석방되었다. 그 후, "극단적인 국가주의적, 폭력주의적 단체 및 법무총재 지정 단체의 유력 분자"라는 이유로 공직 추방되었다.[4]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참조

[1] 서적 右翼辞典
[2] 뉴스 荒木・南・小磯・松岡ら十一人に逮捕命令 朝日新聞 1945-11-20
[3] 뉴스 食事の量は十分、米紙の報じる巣鴨風景 朝日新聞 1945-11-28
[4] 뉴스 朝日新聞 195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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